2월 21일은 빠른 90년생인 상봉이의 열 아홉번째 생일이었다. CJ 선수들이 생일날 경기가 있으면 곧잘 이기기도 했고, 이미 1경기를 좋은 빌드와 상봉이다운 러쉬로 송병구는 '실력이 아닌 올인'이라며 어처구니 없이 폄훼했지만 이겨 놓은 상황이었기에 상봉이가 이기고 정말 오랜만에 씨드를 딸 것을 확신했었다.

  하지만 상봉이는 경기 내에서 긴장하고 망설이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다가 두 경기를 내리 지고 말았다. 송병구는 상봉이가 못 이길 상대가 절대 아니었고, 그렇게 겁먹을 일도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화도 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오로지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 아이가 아직 열아홉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린 마음에 좌절해서 꾸준히 잘 끌어올리고 있던 페이스를 떨어뜨리면 어쩌나, 감독님이 프로리그도 빼주면서 MSL을 준비하게 해 주셨는데 떨어졌다는 마음에 죄책감이라도 들면 어쩌나,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웃었던 상대 선수가 인터뷰에서까지 막말한 것을 보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들면 어쩌나. 제발 자존감에 상처입지 말고 늘 웃는 얼굴이었던 요즘 분위기 잘 유지하도록 주변에서 도와줘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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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중계진의 표현대로,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한상봉은 송병구에게 제대로 된 설욕전을 치렀다. 경기를 지고 나서 그것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음 경기에서 멋지게 이기는 것이다. 상봉이로서는 대 삼성전에 나와서 송병구를 꺾는 것이 패배를 극복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였고, 결국 그것을 현실화했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상상만 하던 것일 뿐이었다. 늘 "상봉이가 어느 날 위너스리그에 나와서 3킬씩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고, 송병구에게 MSL 16강을 패했을 때는 "내일 삼성전에 나와서 이겨버려!"라고 말했지만, 프로리그에서 연패중이고 출전 기회도 적었던 상봉이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미미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상봉이가 패배로 인해 받을 충격이 더욱 걱정됐었다. 다른 선수들이야 다들 잘 하고 있는 상황이고 개인리그에서 져도 프로리그에 나오면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지만, 상봉이는 그럴 기회를 못 잡기라도 하면 다시 자신감 찾고 좌절을 이기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 따위는 멀리 던져버리라는 듯, 다음 날 낮 경기에 나온 상봉이는 나에게 눈물 글썽글썽한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것도 보란 듯한 운영으로, '실력이 아닌' 드라군 리버 '올인' 전략을 쓴 송병구를 막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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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욕전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톱니바퀴 맞물려가듯 일련의 행동을 하고 판단을 내려주어야 했다. 우선 우리팀의 선수가 삼성의 선봉 혹은 다른 선수를 꺾어서 다음 선수를 불러내야 한다; 김가을 감독은 송병구를 그 자리에 출전시키겠다는 결심을 해야 하고; 송병구는 우리팀의 누군가를 이겨서 상봉이가 나올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전날 지고 와서 잔뜩 화가 나 있는 봉봉이를 본 감독님은 곧바로 출전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프로리그 연습도 별로 못한 상봉이는 그럼에도 이길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뭉쳐서 출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송병구를 이겨야 한다.
  
  후에 한 일련의 인터뷰들을 보니, 순하디 순하고 예의바른 상봉이도 송병구가 경기를 하는 도중에 일부러 웃음을 짓고, 상봉이가 '올인'을 해서 이긴 것은 실력이 아니기 때문에 져서 화가 났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인터뷰를 한 것에 대해서는 화가 많이 났었나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상봉이만큼이나 불쾌했을 감독님은, 정당하게 화가 난 상봉이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프로리그 연습에서도 빼 주었던 상봉이를 송병구가 이기자마자 내보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감독과 동료들과 팬들과 심지어는 중계진의 기대에 부응하며 끝내 이겨 온 상봉이는 그 화를 결국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승리하는 에너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상봉이가 만약 그 화를 못 이기고 좌절하거나 자책하고 후회하는 등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사고했다면 절대 이런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다는 감정을 "내일 기회만 잡으면 이겨주겠다!"는 의지로 승화시키고,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빌드로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치뤄낸 상봉이는 결국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화anger>에서 틱낫한 스님은 "화는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에너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강력한 에너지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셨다. 상봉이는 이날, 그 '에너지의 전환'을 최대한 활용한 사례를 몸소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부터 팀 팬으로 시작했기에 언제나 팀의 승패가 나의 기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조금 더 아픈 손가락과 덜 아픈 손가락은 있었을지언정,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우리팀 선수들은 하나하나 다 관심있고 마음가고 어여쁘다.
  하지만 이날만은 상봉이가 송병구를 이긴 것 때문에, 팀이 졌음에도 마음이 안 좋지만은 않고 왔다갔다 했다. 어떻게 저렇게 조그만 선수에게서 그렇게 큰 의지와 힘이 솟아나서 당장 모든 것을 극복해냈을까 싶어서 뿌듯한 마음이 컸다. 다음 경기인 대 SKT전에서 대장으로 출전해서 대 삼성전 출전이 '홧김에' 한 출전이 아니라 실력으로도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심지어 팀을 승리로 이끌어서 또다시 이전 경기에서 마무리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다 극복해버린 상봉이.
 
  또다시 모두 고맙다. 
  송병구에게 져서 기회를 만들어 준 형태에게도 고맙고, 그 순간 상봉이를 써야겠다고 판단한 감독님도 고맙고, 두려움도 없이 경기하겠다고 튀어나간 상봉이도 고맙다.






입술은 앙다물고 통통통, 튀어나오는 상봉이의 얼굴이 어찌나 마-알갛게 예쁘던지.
"한상봉-" 하고 소리치는 중계진의 신난 목소리와 더불어 "정말 상봉이가 나왔어!"라며 깔깔거렸더랬다.
MSL 준비에 올인시켜주신 것 다 알고 있는데 바로 다음날 송병구가 나왔다고 출전시켜주시는 감독님의 센스란!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빌드인 5해처리 운영을 택하면서도 필수적으로 9풀을 지어주는 사랑스런 상봉이.+_+
셔틀리버가 우연히 잡힌 것 같지만 사실은 스컬지로 셔틀을 위협해 앞쪽으로 피하게 만든 뒤
히드라 한부대 가량이 예측 지점으로 뛰어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사격한 플레이였다는 거!
한승엽 해설의 말대로 끝까지 히드라로만 끝내려는 고집은 너무나 "한상봉스럽다".



그래, 그렇게 너의 힘으로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것을 극복해냈으니,
다음 경기부터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밝게 웃는 모습을 또다시 기대해도 되겠구나.
걱정따위는 하지 말라는 듯 곧바로 좋은 컨디션 증명해 주는 고마운 아이.

Posted by +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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